비텐베르크는 ‘종교 개혁의 모체’라고 불린다. 루터 관련 장소 중 가장 많은 활동지를 담고 있거니와, 절친이자 동역자였던 멜란히톤의 거처가 있고, 또 다른 친구였던 예술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흔적이 어려 있는 곳이다. 1521년 1월 3일자 파문 교서를 통해 루터와 로마 교황청은 영원한 결별을 맞이했다.
베텐베르크 신생 대학의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던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하여 부지불식간에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성경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가르침으로써 강압된 수도사 서약은 원인 무효화되었고, 수도원은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농민들은 기존 지배 세력에 반기를 들었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독일 남부와 중부 지역을 강타하였다.
루터는 1501년 대학생이 되어 에어푸르트에 입성했다. 10~11년 정도 머무른 이곳을 루터는 어머니와 같은 도시로 기억했다. 1505년 7월 2일, 루터에게 이 날은 인생 반전의 날이 되고 말았다. 만스펠트에 계신 부모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이 날, 낙뢰에 맞아 그만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성 안나여, 도와주세요.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불쑥 이런 고백을 하고 난 후 그는 7월 중순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회심의 장소인 슈토테른하임은 에어푸르트 북쪽으로 10km 떨어져 있다.
수도원 생활에서 루터가 던진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였다. “어떻게 하면 내가 선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아주 자그마한 양심의 거리낌도 허락하지 않았던 루터는 철저한 율법적 수행자로 살았다. 결국 그는 1507년 4월 3일, 현 에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루터는 한마디로 삶과 죽음이 일치한 사람이었다.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난 그는 다음 날 베드로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 지역 백작의 유산권 논쟁을 중재하고자 들렀다. 중재를 성공리에 마친 후 루터는 협심증으로 영면에 들었다.
1546년 2월 18일, 이 땅을 떠난 것이다. 루터의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크게 교차하는 곳이 바로 이곳 아이스레벤이다.
1546년 2월 18일, 이 땅을 떠난 것이다. 루터의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크게 교차하는 곳이 바로 이곳 아이스레벤이다.
1521년 4월 16일에 보름스에서 삼두마차를 타고 북문으로 입성한 루터는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제국의회에서 확신에 찬 음성으로 루터는 황제 칼 5세에게 궁극적인 답변을 주었다. 때는 1521년 4월 18일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당시 영적 최대 지도자 교황 레오 10세에게 내던진 폭탄선언이었던 셈이다. 루터가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그 순간에 전폭적으로 붙들고 의지하고 경청했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었다.
당시 보름스의 인구는 7천여 명 정도였는데, 제국의회로 말미암아 1만 4천여 명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